연극의 특성상, 보편화된 공간(여러 장소로 활용해야 하니까)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풍경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없다. 단지 인물들의 대화(88 올림픽, 그 시기의 정치인 이름, 개봉한 영화 제목 등)를 통해서 다른 시간의 장면들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선희와 선미- 그 이름의 유사성과 사망한 모친, 무용, 시간의 순차성을 고려했을 때.
살인범은 이중호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남지운 작가 역시 아이가 있고, 공황장애로 약물 치료 중(이중호 역시 정신과 진료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이라는 점에서, 87년도의 남지운과 09년도의 이중호가 동일인물이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다.(남지운이 자신의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동일인물설 소거ㅋㅋㅋ.실종된 선희의 아이=선미는 실종 당시 18개월로 대화가 될 리 없다.)
남지운은 피해자 중 하나의 남편일 뿐이고, 이중호는 숫자집착증의 연쇄살인범일 뿐.
요즘에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수사물에서 얻은 지식을 들어보자면.
'칼로 찌른다'는 행위는 일종의 성행위로 풀이될 수도 있고, 성기를 공격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이든 성적인 것이 원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했다. 여자와 남자, 그 살해수법이 다르다는 부분에서 확실히- 범인이 여자를 싫어하는 것 같다. 어쩌면 살해동기는 조용두 형사와 남지운은 후반부에 순대국 집에서 나눈 이야기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
3과 7에 집착하는 범인이, 일곱번째 살인을 마치고 얻은 선미는 일종의 트로피가 아닐까 싶다.
악몽을 꾸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에서, 혹여 선미를 키우는 중에 인간적인 양심을 자각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선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토막내는 걸 봐선 그것도 아닌 듯.
극이 재미있냐, 재미없냐로 굳이 나누자면, 재미있는 편.
병렬구조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시간이라면 누가 가장 유력한 범인인가, 두개의 시간이라면 누가 가장 유력한 범인인가- 나누어 고민하는 것도 일종의 재미인듯?ㅋㅋㅋ
구성은 2% 부족한 것 같은 느낌.
시간 트릭이 배제된(혹은 일찍 깨달은 관객의) 경우, 연극은 추리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87년도엔 범인이 등장하지 않고, 09년도엔 누가 봐도 범인이다)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마지막에 암시된 범인 역시 '반전'이라기보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 그저 87년도는 87년도일 뿐이고 09년도는 09년도일 뿐인.. 2개의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갖다붙인 느낌이랄까..
이미 언급했듯이 연극의 특성상, 보편화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의 흐름이 병렬구조로 진행되고 있음을 처음부터 깨닫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남지운의 장면과 이중호의 장면을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러한 속임수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사용할 수 없게된다. 인물 외에 배경을 모두 지우고 영화 장면을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누가 보더라도 처음부터 시간적 병렬구조임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극과 같은 시나리오로 이중호가 범인임을 제시한다면 87년도엔 용의선상은 물론, 탐문수사 중에도 그 모습을 단 한번도 비추지 않은 이중호가, 09년도에 갑툭튀해서 "내가 범인"하고 상황을 종결시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87년도에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증거가 없어 빠져나간 인물이거나 최소한 탐문 중에라도 만났던 인물이, 범인이 아닌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범인이었다-는 편이 진부한 구조이기는 하나 오히려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아예 09년도는 배제하고, 87년도의 남지운 시점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09년도 택시 안의 장면으로 끝내는 것도 괜찮을 듯. 범인이 우리 일상 속에 섞여있다는 느낌으로..? 물론 이런 진행이 되려면, 경찰 수사보다는 남지운의 탐문이나 추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겠지만.
살해 동기나 선미를 키우는 이유 같은 부분도 설명이 없긴하지만, 무차별 살해도 없는 일은 아니라는 점과 시간적 제한 때문에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모든 범인이, 안경잡이 초딩 탐정이 나오는 만화처럼 구구절절하게 살해동기를 밝혀야한다는 법도 없으니까ㅋㅋ
(싸이클럽에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 살해동기는-
술집 작부를 친모로 둔, 친부를 모르는 사생아로 힘든 어린 생활을 보내다가, 친모를 죽이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아나게 되고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난잡한 여자들을 심판한다는 것.
3월 7일은 이중호 자신의 생일이며, 이 때문에 3과 7에 의미를 두는 것.
마지막 일곱번째 살인 후 죽으려고 했지만 선미를 새로운 계시로 받아들여 정숙한 아이로 키우고, 선미를 정숙한 상태로 보호하기 위해 선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살해하여 7토막내어 3번 국도 어딘가에 묻는 것으로 살해동기 변화.)
전반적으로 괜찮은 연극이긴 했지만.
개인적 평가로는 예전에 봤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장르가 다르긴하지만, 재미가 있고 없고는 그거랑 큰 상관은 없으니까.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스토리가 가물가물한 것이.. 확신할 수 없다는게 함정ㅋㅋㅋㅋㅋ
한 가지 더.. 싫었던 점을 꼽자면.
중앙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피커가 바로 옆에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bgm 소리가 너무 컸다. 인상이 찌푸러들 정도로 시끄러웠음.